본문 바로가기
북앤 드라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존 그레이의 남녀 관계에 대한 반론

by recipe™ 2024. 6. 24.

조금 옛날에 ‘남녀 관계의 바이블’, ‘연애의 교과서’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관계 카운슬러 존 그레이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1992년)입니다.

스테디셀러가 된 연애 교과서

처음 이 책을 읽고 남녀는 태생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 서로 이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 외에는 특별한 영감은 받지 못했습니다. 시시콜콜한 연애서적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이 책이 그 당시(2008년) 미국에서만 60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다는 사실에 놀래기도 했었습니다.

"옛날 옛적 화성남자들과 금성여자들은 서로를 발견하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사랑의 마법에 걸린 그들은 무엇이든 함께 나누면서 기쁨을 느꼈다. 비록 다른 세계에서 왔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았다. 그러다 지구에 와서 살면서 그들은 이상한 기억 상실에 빠졌다. 자신들이 서로 다른 행성에서 왔고,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것을 존중해 왔던 사실이 기억에서 모두 지워지면서 그들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2008) 중에서

그런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이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아 2021년 100만 부 판매 기념 특별 리커버 에디션을 출판했더라고요. 150개국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5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USA 투데이》는 지난 25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책 10권 중 하나로 이 책을 선정했다고 합니다.

존 그레이의 남녀 관계론

사실, 이 책의 저자 존 그레이의 핵심 주장은 아주 간단하고 보편적인 상식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녀 관계가 깨지는 이유는 남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고 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너무 단순한가요?

사랑은 빠질 때에도, 깨질 때에도 신비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처럼 영원한 느낌으로 다가온 사랑이 어느 날 갑자기 확 깨져버리는 이유가 남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니 뭔가 이상하긴 합니다. 

100만 부 판매 기념 특별 리커버 에디션
100만 부 판매 기념 특별 리커버 에디션

책을 읽으며 저자 존 그레이의 도식적이고 편향적인 남녀 편 가르기를 보며 웃음이 절로 났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즉, 여자는 관심과 이해, 공감이 필요한 존재이고, 남자는 신뢰, 인정, 표현을 필요로 한다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예컨대 남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로 저자가 예시로 들었던 사례를 볼까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듣더라도 건성으로 듣다가 이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버리기 일쑤이고, 질문을 해서 관심을 표명하는 일도 없다"
-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흔히 저지르는 실수

하지만, 남자들만 이러한 실수를 할까요? 저자 존 그레이는 이러한 이분법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나열합니다. 여자를 관심과 이해, 존중과 헌신, 공감과 확신을 바라는 감성적인 동물로 묘사하는 반면, 남자는 신뢰와 인정, 감사와 찬미, 찬성과 격려를 욕망하는 동물로 대비시켜 놓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관심은 여자만의 영역이고 신뢰가 남자만의 영역이라고 쉽고 간단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시콜콜한 연애지침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남녀에 대한 편향적인 고정관념으로 말미암아 어렵게 시작한 연애를 도리어 망치게 되는 커플은 없을지 은근 걱정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사랑은 잡다한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애 상담서가 흔히 빠지는 오류는 젠더 전형화를 통해 개인을 평균으로 축소하여 개인을 그가 속한 집단에 대한 가정에 근거하여 판단하게 되는 편향에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두 행성에서 왔다는 농담은 여성과 남성이 모두 동일한 행성에서 진화했으며, 그와 동시에 생각하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점이 아주 조금 있다는 진실에서 우리를 멀어지도록 합니다.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를 넘어서

더욱이 화성남자와 금성여자라는 관점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편을 가르는 편견을 확대 재생산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르기나 하나, 그렇다고 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반대 성에 대해 경박한 마음으로 떠들어 대는 것은 쉽게 성 차별로 빠질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인기 시리즈를 계속 출판해야겠다는 욕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2018년에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를 넘어서>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저자의 책을 더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큰 관점은 변화된 것이 아니라면 내용은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남녀 관계도 서로 다름을 강조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라는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 서로서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닐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