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금요일이 제일 기다려지는 날입니다. 주말 부부라 금요일에 비로소 가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와이프가 쉬는 날이라 저녁으로 백숙을 준비해 놓았더군요.
우리 집 아이들은 삼겹살과 치킨, 이런 종류를 참 좋아합니다. 물론 백숙도 언젠가부터 잘 먹어 백숙 요리도 자주 합니다. 요즈음은 마트에서 잘 손질한 닭백숙을 팔기 때문에 가끔 집에서도 편하게 닭백숙 요리를 할 수 있으니까요.
와이프가 한 시간 넘게 푹 고은 닭백숙을 먹던 아들이 "저번에 아빠가 한 백숙은 정말 육질이 연했는데..."라고 말해서는 안 될 시식평을 하고 말았습니다.
순간, 식탁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아무리 마트이지만 품질이 다 고르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라고 급하게 둘러댄 내 말에 이내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닭백숙은 아무래도 푹 고아야 제맛이 난다고나 할까요?
계절은 어느새 가을이 왔고, 올해 대학에 입학한 딸은 대면 강의하나 들어 보지 못한 채 벌써 2학기 중간고사 시험을 어제오늘 치루고 있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중간고사 시험기간인 모양이에요. 그래서 오늘도 딸은 저녁을 먹고 제 방으로 가서는 두문불출하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배가 고프다며 "아빠도 배고프나?" 하더니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늘 맥주를 습관적으로 마시는 터라 배가 고플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딸이 라면을 끓여 준다는 걸 사양할 수는 없었지요.
딸이 끓인 라면 면발은 딱 제 입맛에 맞았습니다. 덜 익지도 않고, 너무 많이 익지도 않은 것이 라면, 본연의 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야, 시계도 안 보고 끊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면발이 적당하게 쫄깃할 수가 있어"라고 감탄했습니다.
"아빠는 라면도 시계 보고 끓이나? 그래도 내가 라면은 좀 많이 끓여봤지, 딱 보면 알잖아. 입안에 넣었을 때 졸깃한 맛이 나는 순간의 면발을 캐치해야지. 이게 내 봉지라면 맛있게 끓이는 비법이라면 비법이지. ㅋㅋ"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백번 맞았습니다. 요린이는 뭐든 계량해서 하지만, 구루는 뭐든 눈으로 보고 감으로 맞추는 법이지요. 비단 라면뿐이겠습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런 것을요.
암튼, 오늘 오랜만에 딸이 끓여준 라면을 둘이서 맛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어떤 분은 라면에 김치를 넣어야 제맛이라 하고, 어떤 분은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여야 라면의 오리지널티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오늘 딸은 계란만 넣어서 끓였습니다.
라면 맛은 그때그때 다른 것 같습니다. 라면도 역시 어떻게 요리하는가 보다,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맛을 좌우하는 거 같습니다.
디데이 계산기를 보니 조기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은퇴일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이 증폭하여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 이토록 소소한 일상에서 위안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조기은퇴 날짜를 못박고 나서 고민하던 차에 이 블로그를 개설하게 되었고, "조기은퇴 전야"라는 카테고리를 만들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먼 훗날 지금의 내 감정 기록들을 보면 아마도 많이 부끄럽겠지요.
그러나 오늘 귀한 라면을 딸과 함께 먹었다는 이 감정을, 그럼에도 고스란히 간직해두고 싶은 아주 작은, 이 소소한 바램을 기록해 두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밤입니다.
댓글